가룟 유다, 그는 누구인가?
은전 서른 닢에 예수를 팔아버린 가룟 유다, 그는 인류역사상 가장 저주받은 인물이다. 예수의 수제자 배드로만큼이나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인물이면서도 절대적인 타자他者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그는 정말로 특별한 인물인가? 그는 숙명적으로 신에게 버림받은 전무후무한 존재인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 소재로 선택한 인물 중에서 예수와 가룟 유다의 모델이 동일인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사실여부를 떠나서, 이를 약간의 감동을 주는 설교의 예화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까? 과연 그는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인물일까?
1. 가룟 유다의 신분
‘유다’라는 이름은 '찬송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이름 앞에 붙은 ‘가룟’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를 보는 시각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일반적인 시각은 ‘출신지’로 보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그는 헤브론 남쪽 조그만 성읍 ‘카리옷의 남자’[이쉬카리옷’(Ισκαριωθ)]로서 갈릴리 출신의 다른 제자들에 비해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로 구별된다.
‘거짓된’을 의미하는 아람어 seqar와 관련된 것으로 볼 때 이는 보수적인 시각을 대변하는 것이다. 이 경우 ‘가룟’은 ‘예수를 배신한 자’에 대한 치욕스런 별명이다.
‘저격자’ ‘자객’으로 해석되는 Sicarius로 추정하기도 한다. Sicarius는 유대의 독립운동단체인 열심당원으로서의 유다를 지칭하는 것으로서 진보적인 시각을 나타낸다.
유다는 특이한 인물이다. 다른 제자들이 가나안 북부의 갈릴리 출신인데 비하여 그는 남부의 유대지방 ‘가룟’ 출신이다. 이곳은 비교적 교육여건이 좋았다. 따라서 그가 다른 제자들에 비하여 보다 나은 교육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갈릴리는 가나안 북부의 갈릴리 호수 서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예로부터 유대인과 이방민족이 함께 거했으며 기원전 734 년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의 침략으로 유대인의 다수가 포로로 끌려갔다. 수리아 지역을 통치한 셀류쿠스 왕조의 폭군 안티오쿠스 Ⅳ세가 예루살렘성전을 모독하고 유대인을 탄압하던 시기(기원전 167 년)에는 일부 유대인들이 박해를 피해 갈릴리로 이주하기도 했다. 따라서 남쪽 유대지방의 사람들은 ‘혈통이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과 ‘예루살렘을 떠난 사람들’이라는 것을 이유로 갈릴리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러나 갈릴리는 이민족의 잦은 침략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저항세력들이 태동했고 ‘열심당’의 근거지가 되었다.
유대인들이 갈릴리 사람들을 경멸했다는 사실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빌립이 친구 나다나엘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전하자 나다나엘은 ‘나사렛(갈릴리의 한 마을)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를 빗대어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요 7:41)고 빈정거렸고, 바리세인들은 예수를 변호하는 니고데모를 향해서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요 7:52)고 비아냥거렸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볼 때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많이 다르다. 그는 갈릴리 어부 출신의 제자들과 비교할 때 최소한 그들보다 좀 더 나은 교육을 받은 세련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가 남쪽 유대에서 갈릴리로 올라왔다는 것은 저항세력 중 하나인 열심당의 일원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 그리고 돈궤를 맡았다는 사실에서 그가 계산이 빠르고 똑똑한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기룟 유다와 열심당
열심당(熱心黨)은,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의 폭정에 저항했던 ‘갈릴리 사람 유다’의 지도하에(행 5:37), 기원전 6년에 창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젤롯당(Zealot당), 시카리당(‘칼을 소지한 자’ ‘시카리우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이라고도 불리며, ‘열심과 질투’라는 두 가지 정신을 내포하고 있다.
열심당은 극단적인 종교적 애국․국수주의 단체로서, 로마제국의 식민통치에 무장투쟁으로 맞설 것을 주장한 유대의 저항운동조직이다. 하나님의 기업 이스라엘에 대한 로마의 지배를 극도로 증오하며, 폭력혁명을 불사하며, 이를 통하여 메시야에 의한 이스라엘 회복을 촉진시키려했다.
예수의 제자들 중에는 가룟 유다 외에 공식적으로 언급된 열심당원이 하나 더 있다. 그가 바로 ‘셀롯이라는 시몬’(눅 6:15)이다. 셀롯(젤롯)이 열심당의 명칭이니 그는 그야말로 공표된 열심당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초대교회문서에 의하면 열심당과 관계있는 인물이 더 있는데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작은 야고보)와 ‘유다 다대오’이다. 야고보는 예수의 영적인 가르침에 대하여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요 14;22)라고 질문함으로써 열심당으로서의 급진적인 자기 생각을 드러냈다.
유다는 평균학력 이상의 배움을 지닌, 그리고 ‘로마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진 유대 청년이었다. 그는 열심당의 일원으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위해 갈릴리에 왔고 때마침 예수를 만났다. 그의 눈에 비친 예수는 초월적 능력과 청중을 휘어잡는 언변을 지닌 출중한 지도자였다. 로마의 통치가 길어지고 ‘갈릴리 봉기’(기원전 4 년) 이후 이렇다 할 지도자가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저항운동에 대한 피로감이 쌓여갈 즈음에 예수를 만났으니 그의 눈이 번쩍 띄었을 것이다.
예수는 인류의 역사 속에 등장한 이후 지금까지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왜곡되고 이용당했다. 예컨대 중세시대에는 교회가 교권 강화를 위해서 예수를 앞세우고 성전聖戰이라는 미명하에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신도들을 죽음의 전장으로 내몰았다. 20세기에 들어와 해방신학이 태동했고 일부 급진적인 추종자들은 예수를 ‘억압받는 자의 해방을 위한 혁명가’로 만들었다.
교회 안에는 가룟 유다 같은 이들이 많다. 그들은 복음으로 말미암는 내적인 변화를 추구하기보다 외적인 변화를 추구한다. 예컨대 소외된 자 가난한 자를 위한 가시적인 행동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정치적이며 이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생애 마지막 유월절을 앞둔 어느 날, 한 여자가 아주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는 예수의 머리에 부었을 때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며 꾸짖었다.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마 26:8,9) 하지만 이는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요 다분히 가룟 유다의 영향을 받았음직한 말이다.
요한복음은 이 사건을 좀 더 심층적으로 기술하며, 이 말을 하게된 가룟 유다의 동기가 결코 선하지 않음을 고발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 12:6)
가룟 유다는 누가 들어도 동의할만한 아주 괜찮은 말을 함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높였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그는 폼 나는 말로 자기의 속셈을 감추며 동시에 돈궤를 맡은 자로서 앞으로 훔쳐낼 수 있는 돈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그는 열심당이었지만 이미 변질되어가고 있었다. 세계 제국 로마에 맞서는 것에 지쳐갈 즈음에 메시아로 확신할만한 인물 ‘예수’를 만나서 제자가 되었지만 3 년이 지나도록 이룬 것이 없었다. 오히려 예수는 그의 기대와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대중적 인기를 잃어갔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는, 공생애 초반과 달리, 능력을 나타내기보다 자기에게 다가올 고난과 죽음을 강조하며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서서히 예수에 대한 기대를 접기 시작했고 마음속에서는 자기보상심리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결국 돈궤를 축내기 시작했다.
3. 가룟 유다의 실패 원인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가시적인 왕국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욕구가 충족되는 왕국이 아니다.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은 왕국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세속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소욕을 버림으로 참여할 수 있는 왕국이다. 하나님의 뜻에 굴복할 때에만 주어지는 왕국이다.
가룟 유다의 실패는 근본적으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자기의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았고 끝까지 예수가 자기의 기대에 부응해주기를 강력히 희망했다. 그러나 예수는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그의 기대에서 멀어졌다. 예수가 고난과 죽음을 자주 언급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세속적 인기가 아예 폭락하기 시작했다. 가룟 유다의 꿈인 ‘다윗 왕국의 실지회복’은 아득해져만 갔다. 그의 마음은 절망과 예수에 대한 배신감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이는 극도의 분노로 변했다.
그가 변화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최후의 만찬 후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이 같이 말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목욕했다는 것은 거듭났다는 의미요 발을 씻는 다는 거듭난 자가 범하는 낱낱의 되를 씻는 다는 의미다. 따라서 가룟 유다가 그 때까지도 거듭나지 않았거나 아니면 영적인 변화와 성장이 없이 타락했을 가능성을 유추할 수 있겠다.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이 거듭난 시점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다른 제자들은 속도가 느릴지라도 점진적으로 변화되었고 가룟 유다는 거의 변화되지 않았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 다. 거듭남의 증거는 세속적인 가치관이 예수 안에서 예수 중심의 영적인 가치관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가룟 유다는 끝까지 자기의 생각을 고집했고 변화를 거부했다.
유감스럽게도 교회 안에는 거듭나지 않은 자가 섞여있을 수 있다. 진정한 신앙고백이 없이도 자기의 필요에 따라서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혹은 변화와 성장이 중지되어 타락한 자들이 존재할 수 있다. 예수는 이런 저들을 ‘가라지’로 비유했다. 가라지는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존재한다.[마 13:1-30]
이스라엘민족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는 ‘잡족’[출 12:38] 혹은 ‘섞여 사는 다른 인종’[민 11:4]이 있었고 그 후로도 개종하지 않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백성들 속에 존재했다. 그들은 언제나 이스라엘을 실족케 하는 어둠의 세력이었다.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가라지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였다. 그리고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자 수많은 이교도들이 진정한 개종 없이 오직 살기위해서 교회로 몰려들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선택에 의해서 혹은 철학적 사고에 의해서 그리고 기타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지고 교회로 들어온다. 이들은 애초부터 가라지이거나 가라지로 전락한 자들이요 가룟 유다의 길을 가는 자들이다.
이는 매우 두려운 사실이다. 특히 구원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한국교회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부담스럽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 문제에 대하여,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백성들 중에 수많은 자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었음을 상기시키며,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심각하게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조상들이 광야에서 시험 받던 날에 반역한 것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라. 거기에서 그들은 나를 시험하여 보았고, 사십 년 동안이나 내가 하는 일들을 보았다. 그러므로 나는 그 세대에게 분노하여 말하였다. '그들은 언제나 마음이 미혹되어서, 나의 길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진노하여 맹세한 대로, 그들은 결코 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믿지 않는 악한 마음을 품고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오늘'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날, 서로 권면하여,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가진 확신을 끝까지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함께 누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반역하던 때와 같이, 너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아라" 하는 말씀이 있는데, 듣고서도 하나님께 반역한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나온 사람 모두가 아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진노하셨습니까? 죄를 짓고, 시체가 되어서 광야에 쓰러진 그 사람들에게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습니까? 순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결국 그들이 들어가지 못한 것이 믿지 않았기 때문임을 압니다.』[히 3:7-19]
4. 수많은 가룟 유다들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 안에서 새로워지는 것이다. 이는 생각과 삶의 방식을 예수에게 맞춰가는 것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자기 생각으로 예수를 판단했고 예수의 뜻과 상관없이 일방적인 기대를 걸었다. 그것은 예수가 메시아로서 유대민족을 이끌고 로마를 쳐부순 후에 다윗의 나라를 회복하는, 즉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교회 안에는 가룟 유다와 같은 유형의 사람이 많다. 예수 안에서 새롭게 변화되어야할 자신을 발견하려하지 않고, 오직 자기 생각대로 예수를 규정하고 예수에 대한 일방적인 기대를 갖거나 예수를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예수 당시에 그것은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유대의 독립이었고 새로운 왕국에 대한 기대였다. 그러나 예수가 가시적으로 현존하지 않는 작금에 있어서 그것은 지극히 종교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종교적 행위를 통하여 예수를 추종함으로써 현세와 내세에 복을 받겠다는 것이다. 복의 내용은 지극히 세속적이다. 부유하고 건강하게 오래 살다가 내세에서는 이를 더욱 크게 누리며 영생하는 것이다.
이런 유의 교인들은 ‘자신의 인격과 삶이 예수 안에서 거룩하게 변화되어야한다’는 사실에 관심이 없다. 예배, 헌금, 봉사, 기도 등의 행위에 열을 올리기는 하지만 이는 모두 축복을 얻어내기 위한 하나님과의 거래 수단일 뿐이다. 한국교회가 도덕성에서 바닥을 드러내며 세인들의 지탄을 받게 된 이유가 바로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지극히 정치적인 목적으로 교회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의 제자들과는 형태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사회적 열등감을 종교적 우월감으로 바꾸고, 교회의 직분을 계급으로 여기며 신분상승을 꿈꾸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교회를 이용하여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려한다. 온갖 좋은 말로 치장하고 눈에 돋보일만한 교회의 일에 열성을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유다가 그랬듯이 본질에서 빗나간 종교행위는 변질되게 마련이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시들해지고 대신에 탐욕이 생긴다. 이렇게 되면 이때부터 교회를 이익의 수단으로 삼기 시작한다. 이는 교회를 이용한 직접 간접의 돈벌이일 수도 있지만 가룟 유다처럼 직접적으로 돈궤에 손을 대기도 한다. 그리고 종교에 대한 자기보상심리로 자신의 탈선을 합리화 한다.
현재 교회와 교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불미스러운 일들의 이면에는 이 같은 가룟 유다적인 요소가 숨어 있다. 세속적 안위와 축복에 눈먼 교인들과 이제는 볼 장 다본 목회자들이 바로 그 기막힌 일들의 주인공이라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고서야 기독교가 어찌 기복종교로 변질될 수 있으며 교회 안에서 어찌 그 많은 축재와 성적 추문과 분열과 다툼이 생길 수 있겠는가! 최근에는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교회의 최고통치권(?)을 세습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고 있다. 이는 목회자와 이를 용인하는 교인들이 모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가룟 유다처럼 세속적 동기와 기대를 가지고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을 처음부터 나무랄 수는 없다. 인간의 종교성은 다 그런 것이니까… 문제는 이게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예수를 따를 지라도 배움을 통해 예수 안에서 변화되어야할 자신을 발견해야한다.
공식적인 열심당원이었던 ‘시몬’은 가룟 유다와 달리 변화의 과정을 거쳐서 충성스런 제자가 되었다. 교회 전승에 의하면 시몬은 소아시아, 이집트, 흑해주변을 거쳐 영국에 가서 복음을 전했고 후에는 바벨론 지역까지 진출하였다가 폭도들의 습격을 받고 잡혀서 마침내 톱으로 켜는 죽음을 당했다고 전한다.
끝까지 변화를 거부한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팔음으로써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결국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스스로 파멸의 길을 가는 것이요 예수의 속성과 교회의 본질 왜곡하여 하나님을 모독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5. 가룟 유다, 그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가룟 유다는 최후의 만찬 이전에 이미 마귀에게 그 마음을 빼앗겼으며[요 13:2] 예수로부터 떡 조각을 받아들면서 예수를 팔기로 결심했다.[요 13:27] 예수가 떡 조각을 일컬어 ‘십자가에 달려 찢길 자기의 살’이라 했으니, 이 말을 듣는 순간에 가룟 유다의 기대가 완전히 허물어졌을 것이고 동시에 절망과 분노가 극에 달하는 것이 당연했으리라.
예수는 만찬석상에서 그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마 26:24]
이쯤에서 숙명론에 대하여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겠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배신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났는가? 아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숙명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의 죽음이 구원의 경륜 속에 들어 있었을 뿐이요 누군가가 그 사건의 매개체가 되어야 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죄인들은 모두 이 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다만 그 중에서 가룟 유다가 스스로 그렇게 자기의 운명을 결정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이는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좋을 뻔했다는 예수의 말처럼 지독하게 비극적인 선택이었다.
가룟 유다는 특별한 인물이 아니다. 다른 제자들에 비해서 똑똑했으며 좀 더 아는 것이 많고 고집이 센 욕심 많은 인물이었을 뿐이다. 그가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게 된 이유가 무슨 거창한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단지 그의 가치관이 예수 안에서 변화되지 않았다는 것 뿐이다. 그는 끝까지 예수에 대한 주관적이고 일방적인 기대를 접지 않았다. 가룟 유다의 생애는 신앙에 대한 편견이 인생을 얼마나 심각하게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예일 뿐이다.
그렇다면 가룟 유다는 자기의 잘못된 결정과 행동을 만회할 기회가 없었는가? 유감스럽게도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후회하며 대제사장들을 찾아가 거래를 취소하려했지만 거부당한 후 자살했다.[마 27:3-10] 후회는 했지만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혹자는 가룟 유다와 베드로를 수평적으로 단순하게 비교한다. 예수를 판 가룟 유다나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나 모두 예수를 배반한 것이요 다만 회개의 여부가 생애를 가름했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한 후 통곡하며 회개했지만, 가룟 유다는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정말 그럴까?
아니다. 베드로의 경우는 믿음이 연약하여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연고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가룟 유다는 예수의 본질적 실존을 거부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오직 자기주관적으로 예수를 이해하고 좇았으며 자기의 기대를 이루는 수단으로 이용하려했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와 함께 동거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본질적 실존을 거부했다.
예수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 혹은 모독하는 죄에 대하여 경고했다. 이는 예수에 대한 분명하고도 명백한 성령의 증거를 거부하고 반대하는 것을 뜻한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일으키는 능력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 비함으로써 예수와 함께하는 성령을 모독하고 훼방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성령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베드로가 신앙을 고백했을 때에 예수는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고 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가름침은 이를 뒷받침한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요 15:26]
가룟 유다는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와 동거하며 가르침을 받았고 능력을 경험했다. 이는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최상의 기회였다. 그는 분명하고도 명백한 성령의 증거와 대면하는 축복을 누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본질적 실존을 거부했다. 그는 끝까지 그랬다. 그가 예수를 넘겨주기 위하여 성전경찰들을 대동하고 나타나서 입 맞추며 부른 예수에 대한 호칭은 ‘랍비’ 즉 선생이었다.
이로 보건데 가룟 유다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그가 비극적인 종말을 맞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의 죄는 성령의 증거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훼방한 죄요 베드로의 죄는 연약함으로 인한 것이었으니 이 둘을 수평선상에 놓고 볼 수 없다.
만약에 가룟 유다에게 겨듭난 경혐이 있었다면 영적 변화 혹은 영적 성장이 중지된 자의 타락과 반역을 생각해볼 수 있다. 결정적인 반역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 동일하게 취급된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3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또는 말씀의 선하심과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6]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지만 그 이면에는 공의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 공의는 죄에 대한 심판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죄의 대가이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으로 인한 용서와 구원의 은혜는, 이를 증거하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당장 거부할지라도 지속적으로 음성이 들려진다. 그러나 성령을 통한 명백한 증거를 정면으로 거부하며 구원의 역사를 훼방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
가룟 유다는 오랫동안 직접적이고도 명백한 성령의 증거와 대면했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본질적 실존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변화를 거부했다. 그리고 이는 예수를 배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확실히 성령의 증거를 거부하고 훼방한 것이다.
기독교에 입문하는 자들이 처음부터 예수의 본질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혹자는 여러 종교들 중에서 스스로 기독교를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이는 가룟 유다가 자기주관적인 판단으로 예수를 선택한 것과 같다. 또한 혹자는 간단한 복음의 원리를 전해 듣고 입문했지만 ‘구원과 영생 그리고 세속적 풍요로 이해되는 축복’을 추구하는 것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한다. 이는 모두 예수와 기독교에 대한 편견과 선입관이다.
이는 예수 안에서 마땅히 제거되어야할 요소들이다. 이것들이 제거되는 데에는 많은 저항과 시간이 필요했다. 예컨대 예수가 고난과 죽음을 예고했을 때, 이스라엘의 실지회복을 꿈꾸는 제자들의 잘못된 메시아관으로 인하여 심각한 저항이 일어났다.[마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만류한 것이다. 이에 예수는 냉정하게 뿌리치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꾸짖었다. 예수의 날카로운 책망에는 본질 훼손에 대한 극한 경계심이 담겨있다.
하나님의 일이란 예수의 본질적 사명이요, 사람의 일이란 제자들과 가룟 유다가 기대하는 이스라엘의 실지회복이다. 따라서 사람의 일이란 예수에 대한 선입관과 편견이다. 제자들은 선입관과 편견을 버리고 예수와 기독교에 대한 본질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다른 제자들에게서는 이것들이 점진적으로 제거되었다. 그리고 예수와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변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가룟 유다처럼 예수의 본질적 실존을 받아들이지 않고 변화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 정치적․철학적인 목적을 추구하며 자기만족을 이루려 하거나, 철저하게 종교적인 목적 하에 감각적이며 가시적이고 세속적인 축복에만 매달리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이 끝내 변화되지 않으면 가룟 유다처럼 비극적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다. 이들이 비록 가룟 유다처럼 극단적으로 배신하지 않을지라도 예수와 복음의 본질을 모독하고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훼방한 것이다.
무서운 사실은, 이들 중에는 결정적으로 기독교를 파괴하는 일을 저지르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를 종교화하고, 교회를 세속화하고, 분열과 다툼을 일으키는 자들이다. 그들은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조장한 자들이요, 거대하고 호화로운 성전과 왕궁을 수축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세속화를 부추긴 자들이요, 끝없는 권력다툼 속에서 이스라엘을 파열로 이끈 자이다. 교회 안에는 이 같은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는 볼 장 다본 목회자와 교인들이 너무 많다. 가룟 유다와 같은 길을 가는 자들이다.
예수와 기독교를 본질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가룟 유다는 이를 거부함으로써 멸망의 길을 갔다. 가룟 유다는 절대적인 타자他者가 아니다. 특별한 인물도 아니다. 그는 숙명적으로 신에게 버림받은 전무후무한 존재도 아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는 가룟 유다의 길을 가고 있거나 이미 볼 장 다본 자들이 수두룩하다.
그들을 가려내서 정죄할 수 없는 까닭은 가리지를 뽑다가 알곡이 다칠까 염려되기 때문이요 우리의 소관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알곡들이 가라지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알곡을 건강하게 만들어야 할뿐이다.[마 13: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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